자유주의와 대립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각종 사상들은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강요당한 장발장은 고위직 신부의 사랑으로 회심한다. 빅톨 위고는 감옥을 방문하여 많은 죄수를 만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범죄인= 악인이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들은 사회구조의 모순으로 인해 생겨난 희생자들이라는 관점의 변화를 경험한다. 국가나 사회가 그들을 범죄로 향하지 않게 이끌어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위고 외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겨나면서 자유주의는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게 된다. 이런 생각들을 편의상 진보주의라고 정의하자.

진보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절에 등장한 케인스 경제학은 그중에 하나이다.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는 그의 사상은 이른바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고 뉴딜정책 등을 통해 실현되었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역시 자유방임을 잘못된 사상으로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국가는 더 이상 치안과 국방을 책임지는 작은 존재로 머물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케인스 주의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사회주의에 민주주의를 덧붙인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민주정치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경제민주화 사상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의 불안을 사회가 책임지는 획기적인 시스템인 복지사회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드는 혁명을 이루었다.

진보주의의 발전으로 설 자리를 잃어가던 자유주의에게 석유위기는 커다란 기회였다. 석유위기와 그에 따른 스테그플레이션으로 자유주의는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 ‘대처 이즘’대처이즘’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로 화려한 부활을 이룬다. 1990년대 미국 경제의 부활은 자유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상징이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전까지 그 기세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진보주의를 다시 무대 위로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사회주의의 붕괴로 더 이상 도전받을 것이 없을 것 같았던 자유주의의 위상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성급한 자유주의 종말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비록 구제금융을 통해 일시적으로 회생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이로 인해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한 맹공에 나섰는데 그 배경에는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의 확대가 있었다.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조장하여 불평등은 날로 커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반면 자유주의는 시장의 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양극화와 그에 따른 불평등의 확대는 일시적이며 곧 시장의 힘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1950년대 발표된 쿠즈네츠의 연구결과에 그들의 믿음의 근거를 찾고 있는 모양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초기에는 불평등이 확대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해소된다는 쿠즈네츠의 발표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확대해석’을 경계한 쿠즈네츠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결국은 성장에 의한 자연적 불평등 해결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쿠즈네츠의 연구에 토마 피케티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피케티는 쿠즈네츠의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보완하였다고 주장한다. 1950년대까지 이루어진 소득불평등의 시계열적인 연구를 2000년대까지 연장한 결과는 소득불평등 곡석은 다시 불평등의 방향으로 꺾어졌다.. 진보진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장한 것을 피케티는 통계적으로 증명하였던 것이다.

자유주의 진영은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통계의 오류를 찾아내고자 한 시도는 다른 기준의 자료를 제대로 맞춰보지 않아 도리어 망신을 초래하였고 오류에 대한 지적은 피케티의 주장을 확고하게 만들기만 하였다. 그동안 물증이 없어 부정할 수 있었던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 자유주의자들이 택할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진보주의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피케티의 연구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확고부동한 증거로서의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가 실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불평등 자체를 미워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성장이 정체되어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 따위는 간과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좀 더 급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보완을 하려고 덤비니 피케티의 입장이 다소 난감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오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불평등은 결코 시장에 의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자유주의자들이 피케티의 불평등에 대한 대안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지만 그것으로 피케티 연구의 핵심적인 부분을 붕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불평등은 일시적으로 축소되었을 뿐 다시 확대되고 있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오히려 피케티의 주장대로 축소된 것은 전쟁과 여러 가지 경제외적인 이유로 인해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며 앞으로도 불평등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방임과 시장지상주의에 대한 믿음은 종교에 가깝기에 그들이 의견을 철회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피케티는 그러나 왜 일시적으로 불평등이 완화되었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대로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우연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쟁으로 인한 자본의 파괴같이.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피케티의 분석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물론 피케티도 나름대로 분석을 행하고 있지만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시기의 완화가 우연이 아니라면 오늘날에도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이 보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할 것이다. 과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해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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